역사와 문화 속 숨겨진 맛, 세계 길거리 음식의 인류학 15편 : 길거리 음식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편 (기초): 케밥의 대이동: 몽골 군대의 칼끝에서 시작된 세계 최고의 길거리 고기 요리
2편 (기초): 타코와 옥수수: 아즈텍 문명의 생존 방식이 현대인의 소울푸드가 되기까지
3편 (기초): 피시앤칩스의 탄생: 영국 산업혁명 노동자들을 버티게 한 고칼로리의 위로
4편 (적용): 반미 샌드위치에 숨은 비밀: 프랑스 바게트와 베트남 식문화의 절묘한 식민지 역사
5편 (적용): 뉴욕 핫도그의 뿌리: 독일 이민자의 소시지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 된 과정
6편 (적용): 추로스의 역설: 스페인 양치기들의 비상식량에서 달콤한 놀이공원 간식으로
7편 (문화해결): 젤라토와 아이스크림의 차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귀족들이 숨기려 했던 얼음 장인의 기술
8편 (문화해결): 대만 우육면의 눈물: 국공내전 패전병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만든 길거리 한 그릇
9편 (문화해결): 인도 사모사와 감자: 신대륙의 구황작물이 어떻게 인도 향신료와 만났을까?
10편 (유지/고급): 일본 타코야키의 진화: 오사카 빈민가의 라디오야키가 문어를 만나기까지의 여정
11편 (유지/고급): 싱가포르 사테 거리: 밤이 되면 도로를 막고 숯불을 피우는 다문화 도시의 생존법
12편 (유지/고급): 프랑스 크레페의 고향: 척박한 브르타뉴 지방의 메밀 전병이 고급 디저트가 된 이유 (현재 글)
13편 (종합): 터키 고등어 케밥: 바다 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생선을 굽게 된 이스탄불 어부들의 역사
14편 (종합): 태국 팟타이의 음모: 국가가 나서서 길거리 국수 요리를 유행시킨 기막힌 정치적 배경
15편 (완결): 길거리 음식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위생을 지키며 현지 맛을 즐기는 실전 팁
역사와 문화 속 숨겨진 맛, 세계 길거리 음식의 인류학
얇게 부쳐낸 밀가루 반죽 위에 달콤한 누텔라 초콜릿을 바르고 바나나나 딸기를 얹어 돌돌 말아 먹는 음식, 바로 크레페(Crêpe)입니다. 오늘날 크레페는 프랑스 파리의 낭만적인 골목길 가판대부터 홍대나 도쿄 하라주쿠의 세련된 디저트 가게까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길거리 간식입니다. 들고 다니며 먹기 좋은 이 세련되고 달콤한 양과자 뒤에는, 사실 프랑스에서 가장 소외되고 가난했던 변방 지역인 '브르타뉴' 서민들이 생존을 위해 먹어야 했던 눈물겨운 척박한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프랑스 요리라고 하면 대개 버터 향 가득한 화려하고 정교한 음식을 떠올리지만, 크레페의 진짜 고향인 프랑스 북서부의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은 기후와 토양이 완전히 딴판인 곳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칼바람과 안개가 끊이지 않았고, 토양은 척박하고 산성이 강해 유럽인들의 주식인 '밀'이 도저히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빵을 만들 밀가루가 없으니, 이 지역 사람들은 사시사철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가난한 대지를 구원한 것은 12세기경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 건너온 뜻밖의 작물, 바로 '메밀(Buckwheat)'이었습니다. 메밀은 비료도 필요 없고 척박한 얼어붙은 땅에서도 싹을 틔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브르타뉴인들은 이 고마운 메밀을 거칠게 갈아 물과 소금만 섞어 묽은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열한 둥근 돌판 위에 반죽을 얇게 펴서 구워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크레페의 직접적인 조상인 '갈레트(Galette)'의 시작입니다.
초기의 갈레트는 지금처럼 달콤한 디저트가 아니라, 가난한 농부들이 딱딱한 호밀빵 대신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던 거칠고 짭조름한 생존용 식사였습니다. 그들은 기름기 없는 거친 메밀 전병 위에 그나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달걀 한 알, 치즈 한 조각, 혹은 베이컨을 얹어 한 끼를 때웠습니다.
이 척박한 시골 뜨내기들의 메밀 전병이 프랑스 상류사회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달콤한 크레페'로 진화한 계기는 16세기, 브르타뉴의 마지막 공작 부인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된 '안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 덕분이었습니다. 그녀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오면서 고향에서 먹던 갈레트 문화를 파리 궁정에 소개한 것입니다.
마침 이 시기에는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브르타뉴에서도 밀가루를 조금씩 구할 수 있게 되었고, 하얀 밀가루와 우유, 계란을 섞어 만든 부드럽고 얇은 반죽인 '크레페'가 탄생했습니다. 프랑스어로 '곱슬곱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크리스푸스(Crispus)'에서 유래한 크레페는, 얇은 반죽이 달궈진 판 위에서 익을 때 가장자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귀족들은 메밀 대신 하얀 밀가루로 부쳐낸 이 얇은 빵 위에 설탕이나 달콤한 과일 잼을 얹어 고급스러운 디저트로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크레페가 세계적인 길거리 음식의 왕좌에 앉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세기 말, '수제트 크레페(Crêpe Suzette)'의 우연한 탄생이었습니다.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7세가 프랑스 남부의 한 레스토랑에서 연회를 즐기던 중, '앙리 카르펜티에'라는 젊은 수습 요리사가 왕세자를 위해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크레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소스에 들었던 독한 술(코인트로)에 불이 붙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황한 요리사는 급한 대로 불이 꺼진 소스를 크레페 위에 부어 왕세자에게 대접했는데, 오렌지 향과 알코올이 타오르며 만들어낸 풍미가 기막히게 환상적이었습니다. 왕세자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동석했던 아름다운 여인 '수제트'의 이름을 따서 이 요리를 명명했습니다. 이 화려한 불쇼와 달콤함의 결합은 유럽 저역에 크레페 붐을 일으켰고, 파리의 길거리 상인들은 둥근 무쇠 판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바쁜 도시인들에게 설탕과 버터만 바른 저렴하고 따뜻한 크레페를 말아 팔기 시작했습니다.
바람 부는 척박한 해안가에서 굶주림을 잊기 위해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 굽던 가난한 농부들의 지혜. 그것이 왕실의 화려한 디저트를 거쳐, 오늘날 현대 도시인들의 달콤한 하루를 채워주는 낭만적인 길거리 스낵으로 변모한 과정은 식문화가 가진 위대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파리의 골목길에서 갓 구워낸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물 때 느껴지는 그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은, 단순히 초콜릿 소스의 맛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거친 대지를 일구며 살아남았던 브르타뉴 사람들의 끈질긴 삶이 달콤하게 꽃을 피워낸 역사의 맛인 것입니다.
크레페는 프랑스의 화려한 궁중 요리가 아니라, 밀이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브르타뉴 지방에서 메밀가루를 구워 먹던 생존용 전병(갈레트)에서 유래했습니다.
16세기 안 드 브르타뉴 왕비에 의해 파리 왕실에 소개된 후, 메밀 대신 밀가루와 우유를 사용하면서 얇고 부드러운 오늘날의 '크레페'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19세기 말 오렌지 술을 이용한 '수제트 크레페'의 우연한 탄생과 대중화 과정을 거치며, 파리 길거리의 대표적인 낭만적 테이크아웃 디저트로 정착했습니다.
다음 13편에서는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신비로운 항구 도시, 이스탄불로 향합니다. 바다 위에서 일렁이는 배 위에서 갓 잡은 생선을 그릴에 구워 빵 사이에 끼워 팔기 시작했던 어부들의 치열한 삶의 기록, '터키 고등어 케밥에 얽힌 바다와 거리의 역사 이야기'를 배달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크레페를 드실 때 누텔라와 바나나가 들어간 극강의 달콤한 디저트 스타일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전통 갈레트처럼 계란과 치즈가 들어가 식사 대용으로 먹는 담백한 스타일이 더 궁금하신가요?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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